KH 생각

노자의 깊은 사유

레오날두꼬꼬 2016. 10. 12. 22:18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자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의 말은 신비롭고 오묘하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인 것 같지만,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으로 양자 역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있었다. 지금도 물리학은 발전 중이다. 토마스 쿤은 이러한 변화를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보낸 우주선은 태양계를 벗어나지도 못하는데... 인간이 어느 세월에 외계인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떠한 교수도 어떠한 학자들도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내지만, 절대적인 진리라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많은 학설들이 도전을 받고 대체되어 가는가? 
 
하이데거는 진리가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 라고 하면서 드러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지 한꺼번에 드러내는게 아니라 한다. 하이데거는 <노자>를 읽고 번역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진리는 道는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진리에 대해 다가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우리의 삶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정답이 있는가?
사장님이 부담없이 지내자고 했는데, 정말로 사장님과 “헤이, 컴온~” 하며 하이파이브하며 지내면 어떨 것 같나? “야 이 열여덟놈아~!” 라고 말하시거나 아님 말없이 표정으로 말하겠지. 야구에서 부담없이 방망이를 휘둘라고 했는데 맥없이 삼진당하면 주변의 시선이 어떨 것 같나? 물론 부담이 나를 크게 짓누르면 일을 그르친다. 하지만 부담이 너무 없어도 문제다. 그 중간을 찾아야 한다. 이는 실천으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공자는 중용(中庸)과 시중(時中)이란 말을 한다. 중용은 극단적이고 균형잡힌 것을, 시중은 때에 맞는 유연함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실천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道란 멀리 있음이 아니라 가까이 있고 유연하다는 것을 노자가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