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세계에서 법 집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십여년전에 어느 미국 소년이 차에 스프레이를 뿌렸다는 이유로 태형(곤장)을 선고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선처를 호소했으나, 싱가포르 정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태형을 집행했다.
싱가포르는 서울특별시만한 면적을 가진 도시국가다.
그런 작은 나라 싱가포르가 초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보지않고 국법을 집행한 순간이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B%B1%EA%B0%80%ED%8F%AC%EB%A5%B4 - 싱가포르에 대한 소개
국가경쟁력순위 2위, 반부패지수 5위. 이것이 동남아의 작은 나라 싱가포르의 위상이다.
싱가포르의 체계적인 국가 시스팀을 설계한 사람은 리콴유 전 총리다.
(1) 리콴유와 싱가포르의 역사
리콴유(Lee Kuan Yew, 李光曜)는 1923년 태어났다. 그는 중국 광둥성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한 화교의 자손이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수재였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변호사가 되어 귀국한 리콴유는 노사분규를 중재하며 리더십을 키워나갔다. 급기야 인민행동당을 창당하여 싱가포르의 총리가 되었다. 1959년, 그의 나이 35세의 일이다.
본래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말레이인과 중국인과의 민족 분규로 1965년 연방에서 떨어져나왔다.
연방에서 떨어져나올 당시, 싱가포르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주변의 강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에, 인종도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이 섞여잇어 인종 갈등도 잠재해있었다. 식수도 말레이시아에서 사오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싱가포르를 지켜주던 영국군은 철수한다고 공표했다. 영국군대와 관련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전 인구의 20%나 되었다.
싱가포르라는 국가가 생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형국이었다.
위기의 싱가포르를 지키기 위해 리콴유는 군대를 창설한다. 군대를 창설하여 시민들 스스로 나라를 지키게끔 하여, 자신의 재산과 가족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기르도록 했다. 이를 위해 모든 남자는 집안에 상관없이 병역의 의무를 지게하고, 군 기강을 개선하여 군대 내 인종차별행위를 금지했다. 또한 우수한 인재들을 군인으로 뽑아 외국에 국비유학까지 보냈다. 물론 유학 이후에는 8년간 복무해야 하지만.
군인으로서 복무하는데 특헤를 많이 준 것이다. 같은 징병제 국가인 우리나라로서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2) 교육과 내정
또한 작은 나라는 인적 자원으로 먹고 살아야하기에, 교육에도 신경을 쓴다.
눈여겨볼 대목은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것이다. 국민의 70%가 중국계고 자신도 화교이지만, 국가의 공용어로 중국어를 채택하지 않고, 국제경쟁력을 위해서 영어를 채택했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경제허브로 부상했다.
최근에는 중국이 급부상함에 따라 싱가포르에서는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메리트도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세계의 인재들을 싱가포르에 끌어모은다. 근래에는 미국의 MIT를 비롯한 10여개 대학이 싱가포르에 분교를 유치했다.
또한 무주택자에게 공용 주택을 지어 공급하고, 해외자본의 투자유치를 위해 이론보다 실용이 중요하다고 내세운다. 보수,진보 정책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보수/진보의 대립이 극심한데, 이러한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
(3) 부패 척결의 의지
엄정한 법 질서를 지키고 부패를 몰아내기 위한 리콴유와 싱가포르의 노력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계속돼왔다. 리콴유의 측근, 심지어 그마저도 피해갈 수 없었다.
리콴유의 측근 태 치앙완이 뇌물 수뢰 혐의를 받았다. 태 치앙완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리콴유 총리에게 해명하고자 했지만 거절당했다. 태 치앙완은 치욕을 느낀 나머지 자살하고야 만다.
싱가포르의 법에 의하면 자연사하지 않은 모든 사체는 부검해야 된다고 명시돼있다. 하지만 태 치앙완의 부인은 인간적 정리를 생각하여 시신을 '훼손'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리콴유는 부검을 지시했다. 태 치앙완의 가족은 상당한 모멸감을 느끼고 영원히 싱가포르를 떠나고 말았다. 리콴유는 측근을 잃었지만, 싱가포르의 원칙은 지켜냈다.
그리고 리콴유 자신도 뇌물 수뢰 혐의로 부패행위조사국(CPIB, 싱가포르의 부패를 조사하는 기구)의 조사를 받았다. 비록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리콴유는 이렇게 밝혔다.
" 내가 만든 시스템이 나 자신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싱가포르의 반부패 조사 및 방지 원칙이 잘 운용되고 있는데 대해 만족한다. "
(4) 실용주의적 외교
싱가포르가 철저한 실용주의 외교를 지향했다.
싱가포르가 '화교 국가'라는 인식을 딛고자 '싱가포르≠중국'이며 독립된 국가라는 태도를 고수했고, 중국과 대만 양안 사이에서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외교를 펼쳤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동남아 외교의 중심국가로 떠올랐다.
리콴유의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에 보면, 리콴유가 만난 세계 정상들과의 일화가 자세히 나온다. 리콴유의 기록을 통해 세계를 움직이던 정상들의 면모를 생생히 알 수 있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 대한 기록도 자세히 나온다. 처음 한국인들을 만난건 일본군 소속 한국인들을 보아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한국의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특히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IMF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도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리콴유의 실용주의적 면모는 일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일본군이 2차대전 당시 싱가포르를 점령하면서 학살극을 벌이는 만행을 저질럿다. 하지만 리콴유는 일본에 대해서 악감정을 느끼지 않았고, 일본군 점령기간 싱가포르는 식량난을 겪고 있었으나 일본군의 가혹한 형벌로 평시보다 범죄율이 줄었다고 회고한다. 이를 통해 엄격한 법 집행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5) 싱가포르의 미래
혹자는 싱가포르가 작은 나라여서 정책을 집행하기 수월했다고 본다. 또한 싱가포르는 자연미가 없는 인공적이고 빡빡한 국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더군다 싱가포르에는 단 한번도 정권 교체가 없었다. 리콴유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1년간 총리로 재직했고 퇴임 이후에도 고문으로써 내각에 참여했다. 게다가 현재의 총리는 그의 아들 리셴룽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를 높이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책을 집행하는데 있어 기획, 의지, 추진력 등이 잘 맞아야 한다.
리콴유의 지속적인 개혁은 싱가포르를 강소국(强小國)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미국의 키신저는 리콴유를 두고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게 아니라 인물이 시대를 만든다고 증명했다."라고 평했다.
최근의 싱가포르는 '클린 & 그린(clean&green)' 정책을 통해 친환경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역시 한 발 앞서가는 순발력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강소국 싱가포르의 설계자 리콴유. 그를 통해 국가 경영의 비전을 배운다.
<참고문헌>
리콴유, <리콴유 자서전>, 문학사상사,. 1999
리콴유, <일류국가의 길>, 문학사상사, 2001
김성진, <리콴유-작지만 강한 싱가포르 건설을 위해>, 살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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