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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리더십

현대 인도의 국부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국기    인도의 국장

 

인도는 BRICS의 한 축으로서 중국과 함께 미래의 강대국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은 나라다. 10억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인도는 세계적인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이다.

하지만 인도는 낙후되고 무질서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인도의 이중적인 모습을 영화 '슬럼독 밀리언에어'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인도의 양면적인 모습. 현대 인도의 모습은 한 사람의 국부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자와할랄 네루다.

 

 

http://ko.wikipedia.org/wiki/%EC%9E%90%EC%99%80%ED%95%A0%EB%9E%84_%EB%84%A4%EB%A3%A8

 

 자와할랄 네루는 1889년 태어났다. 그는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멤버였던 모틸랄 네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국인 가정교사를 두었고, 영국의 해로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혹자는 그를 '인도 최후의 영국인'이라 할 정도로 영국신사같이 엄격하고 규칙적이었다고 한다.

 

 영국 유학 시절의 네루, 조(Joe)라고 불렸다

 

 네루는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꼽힌다.

독립투쟁 당시 그는 젊고 활동적인데다가 지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영민하고 중지(衆志)를 모을 줄 알았다.

네루는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1930년대부터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교활동을 펼칠 정도였다.

 독립운동 당시 네루가 구금되었을때, 딸 인디라에게 써준 편지들과 <세계사 편력>, <인도의 발견>이란 책은 유명한 책이 되었다.

<세계사 편력>은 서구중심적인 역사관을 비판하고 진보적인 관점으로 세계사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는 징기스칸을 위대한 영웅으로 칭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일부분 할애하고 있다.

<인도의 발견>에서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인도 독립투쟁의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박식하며, 자신의 조국 인도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네루 일가, 윗줄 맨 왼쪽이 네루, 윗줄 네번째가 인디라 간디, 아랫줄 가운데가 네루의 아버지 모틸랄.

 

 네루는 1947년 신생 인도 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64년까지 18년간 수상으로 재임한다.

<네루 평전>의 저자 사샤 타투르는 그가 인도에 남긴 유산을 네 가지로 정의한다.

민주주의(정치제도), 세속주의(종교정책), 페이비언 사회주의(경제정책), 비동맹(외교정책).

 

 이 중 민주주의는 네루의 가장 큰 업적이자 인도의 자랑거리다. 인도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8억명의 유권자가 투표를 한다.

네루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독립 투쟁의 경력도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다른 신생 국가의 지도자들처럼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존중했고 이를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네루 이후의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17년간, 그의 외손자 라지브 간디가 5년간 집권하면서 네루 가문에서만 40년째 수상이 나왔고, 현재까지 수상은 모두 인도 국민회의당(BJP)에서만 나왔다.

 오늘날 인도의 민주주의가 수준이 높지 않은 것도 족벌정치, 인기영합정치에서 비롯되었다.

 

Hinduist temple, Kandy - Kandy, Central

 세속주의는 인도가 힌두교인만의 나라가 아님을 공식화한 것이다. 파키스탄과의 분리는 출혈이 심했지만, 그의 세속주의 정책으로 현재 1억이 넘는(인구의 13%) 이슬람교도들이 인도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일부 정치인들이 힌두 우익의 기치를 내걸고 종교 간 갈등을 선동하며, 네루의 세속주의를 흔들고 있다. 여전히 인도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이 끓이지 않는다고 한다.

 

 ◁ 케네디와 네루의 부부 동반 만찬

 

 네루는 페이비언 사회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외국 자본의 유입을 경계했다. 그는 계획 경제를 구축했고 공공부문의 지출을 늘렸다. 하지만 공공 부분은 효율적이지 못했고 부패하기까지 했다. 외자의 도입이 늦어지면서 인도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고,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대비하지 못해 성장률은 2~3%에 머물러야 했다.

 

 ◁ 나세르, 티토와 함께

 

 네루 외교정책의 핵심은 반식민주의, 비동맹 외교였다. 당시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제1세계(자본주의)와 제2세계(사회주의)에 이은 제3세계 비동맹 세력들을 규합했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비동맹으로 단결했다.

네루는 티토(유고슬라비아), 수카르노(인도네시아), 나세르(이집트)와 함께 비동맹 그룹의 지도자였다.

1956년에 수에즈 사태가 일어났을때 네루는 국제사회에 이집트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여, 이집트가 외침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비동맹 외교의 성과였다.

하지만 이후 여러나라들 사이의 입장 차이와 냉전의 격화로 비동맹 외교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비동맹 외교에 따라 네루는 중국 간의 관계를 중시했다. "인도인과 중국인은 형제"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였다.

허나 1962년 중국-인도 간의 국경 분쟁이 터졌고, 중국군은 인도의 타왕(tawang)이라는 도시를 점령하다 물러났다. 이로써 인도의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고, 인도는 중국에 끌려가야 했다. 지금도 인도는 중국에 대해 경계심이 높다.

 

 네루는 하루 15시간을 일할 정도로 정력적이었다. 게다가 어느 측근들보다 더 나은 판단력과 일 처리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네루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에게 이렇다할 견제세력도 없었고 그의 판단을 비판해줄 이도 없었다.

말년에 정책들은 지지부진했다.

 

 

 그래도 네루는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는다. 독립운동의 지도자였고 수상 재임 시절의 청렴함으로 인도인들에게 추앙을 받는다. 그의 자손들이 정계에 남아있는 이유도 괜히 그런게 아니다.

 게다가 네루 시절에 인도 국립 의과, 기술, 경영대학이 설립되었다. 오늘날 IT강국이자 기초과학 강국인 인도의 위상은 네루 시절부터 계획되었다. 또한 인도의 핵 개발도 네루 시절에 시작되어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 시절에 완성되었다.

 

 네루는 양장 대신 인도의 전통모자와 옷을 입었다. 독립운동 시절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의상은 인도 전통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네루 스타일도 생겼을 정도다.

 

 

 네루를 모르고서는 현대 인도를 알 수 없다. 그는 여전히 인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