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 관한 책은 한국에서 30여종이 넘게 출판되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또한 한국 사람들은 간디를 인도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돈이 우선시되는 현대 사회에 맞서 무소유를 실천하고, 평화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였던 '선인(善人)'으로 기억한다.
다만, 그를 '성인'처럼 우리와는 조금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를 스님으로 알기까지도 한다. ㅋ
그가 쓴 <간디 자서전>에서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서전'을 읽어보면 간디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노라 인식할 것이고, 그랬던 그가 변화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간디에 관한 책을 일곱 편 읽고 이 글을 쓴다. 이 글의 목적은 인간 간디의 참모습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간디, 그는 어떤 사람인가?
(1) 순탄치 않았던 초년 시절
모한다스 카림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 주의 포르반다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포르반다르 공국의 총리대신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도였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인도 각지에는 영주들이 각자의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는 이들을 대립시키거나 매수하면서 인도의 통치권을 유지하였다.
아버지로부터는 고집, 청렴결백, 신용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헌신, 신앙심, 금욕주의를 물려받은듯 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간디의 성격은 그의 인생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가 신앙심을 갖고 금욕을 실천하는 모습은 어머니를 빼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신념과 엄격한 자기 관리가 묻어있었다.
사람들은 간디의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강조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남성성도 있었다.
간디는 남성성(아니무스)와 여성성(아니마)가 균형을 이룬 것 같다.
7세 때의 간디
간디 부부
간디는 14세에 동갑내기 카스투르바이 마칸지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인도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조혼의 풍습이 성행했었다.
바로 이 대목이 <간디 자서전>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간디는, 사춘기를 맞아 성욕이 왕성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집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그는 아내와 섹스를 하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 외에도 담배를 피우고, 도둑질을 하는 등 그의 사춘기는 바람 잘 날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간디가 자신의 도둑질을 고백했을때,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한 간디도 대단하고, 그를 용서하고 이해한 아버지도 대단하신 분 같다.
간디에게 양심이 살아있으니 죄책감을 느끼고 바른 길로 돌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간디는 19세가 되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변호사가 되는 것이고, 그 지름길은 영국으로 유학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식민지 청년 간디는 당시 세계 최강국의 수도인 런던으로 유학을 간다. 영국은 그에게 많은 문화 충격을 안겨주었다.
처음에 문화 충격을 극복하는 길은 영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해서, 영국 신사처럼 옷을 입고 춤과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인도의 종교와 철학을 다시 배우고, 채식주의자들의 모임에 나가게 된다. 서구화의 한 복판에서 전통을 지켜나간 것이다.
세계화 시대라 하지만, 우리의 것을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아닌가? ^^
유학 시절, 그는 모든 돈의 출납을 사소한 것까지 기록했고 매일 채식으로 일관했다. 실로 나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간디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그런데 변호사로서의 첫 공판날, 그는 심장이 떨리고 간이 콩알만해졌다. 변호사로서 결격사유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는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재판장을 나와버렸다.
간디는 다시 방황을 한다. 그러던 중에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교포 기업의 보조 변호사가 되어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온 것이다.
(2) 투쟁의 시작 - 남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시절의 간디. 터번을 쓴 정장 차림이다.
남아프리카로 온 간디는 여행 도중에 기차에서 쫓겨났다. 그가 분명히 1등석 표를 샀는데도, 백인 역무원들은 그냥 나가라고 해서 쫓아냈다. 마차에서도 마부가 타는 옆자리에 타라는 어이없는 강권을 받고 실랑이를 벌이다 쫓겨난다.
그는 인도인으로서의 인종차별을 목도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들은 '쿨리'라는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이러한 인도인 차별에 맞서 간디는 분연히 일어선다. 인도인을 향한 기차 승차시 차별에 대한 항의를 시작으로, 지문날인 반대, 선거권 차등부여 반대, 인두세 반대 등의 투쟁을 이끌었다.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에게 간디는 '바이', 즉, 형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본래 간디는 변호사로서 별 재주가 없고, 고국에서 성공하지 못해 남아프리카로 떠밀러왔다.
그러한 그가 자신의 신념을 깨닫고 강한 확신과 열정으로 누구도 엄두가 나지 않을 일을 해낸다.
법정에서 말 한 마디도 못하던 그가, 사람들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단결시켜 투쟁을 한 것이다.
현실에 좌절하는 청춘들이 많은 이 시대다. 많은 젊은이들이 간디처럼 신념이 강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를 바란다.
남아프리카에서의 <간디 자서전>에서는 교육, 위생 등 인도인의 생활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나날들과 많은 친구들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벌이던 시절로 채우고 있다.
간디는 톨스토이나 데이비드 러스킨(영국의 사회사상가)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고, 인도의 전통적인 영적 공동체인 아쉬람을 세웠다. 그곳은 농장 공동체였고, 그곳에서 자급자족하며 금욕과 채식을 실천하였다.
흔히 간디를 금욕주의자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간디를 100%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간디는 인도 민중의 개화를 꿈꾸었고 정부의 힘을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돈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력을 가졌고 돈을 경멸하지 않았다.
피셔라는 독일인이 간디를 찾아 인도에 왔는데, 돈과 여권을 잃어버렸다. 피셔는 공산주의자여서 돈을 잃어버린 것은 아쉽지 않으나 여권을 잃어버린 것이 속상하다고 했다. 하지만 간디는 피셔를 꾸짖었다.
" 세상에 가난이 있는 한 돈을 경멸해서는 안 되네."
(3) 독립 투쟁의 한가운데
1918년 참파란에서의 간디
1915년 간디는 인도로 귀국했다. 인도를 떠날 때는 말쑥한 정장의 어린 변호사였지만, 다시 돌아왔을땐 터번에 인도 전통복장을 한 민족지도자로 변모해있었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겸손하고 모범을 보이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인도 장병들이 영국군에 소속되어 참전하였다. 하지만 인도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식민통치를 강화하여 더욱 인도를 쥐어짰다. 이에 간디는, 전국적인 '하르탈(파업)'을 결의, 전 인도인이 하루 동안 여기에 동참했다.
그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 공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금 행진 당시
하지만 영국의 탄압은 잔인해졌고, 암리차르 학살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에 간디는 스와라지(자치), 스와데시(자립)'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새로운 투쟁을 전개한다. '그 투쟁은 비폭력 불복종 투쟁이었다. 물레를 만들어 옷을 직접 짜내 국산애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소금에 매겨지는 세금에 반대하기 위해 열흘 동안 240km를 걸었다. 이것을 소금 행진이라 한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간디를 따랐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았고, 경찰에 연행되어도 저항하지 않았다.
일련의 인도인의 평화적이고 단결된 투쟁은 간디의 특별한 리더십에서 나온 것이었다. 간디는 진실한 품성과 신뢰를 주는 언변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선동이나 투쟁을 유도하기보다, 스스로 행동하여 실천하였다. 그 방법은 비폭력이었지만 강한 불복종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4) 사티아그라하와 아힘사
간디의 사상은 사티아그라하(진리 추구)와 아힘사(불살생, 비폭력)이 대표적이다.
사티아그라하(Shatyagraha)는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해지는 것이다. '간디 자서전'의 제목도 '진리 실험(박홍규는 진실 추구라 번역)'인 것도, 사티아그라하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 종교의 신이나 교리가 아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로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와 <성경>의 산상수훈의 가치를 통합하여 무소유의 가치를 갖게 된다.
사티아그라하는 간디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치였고, 여기에 따라 그는 용기있게 행동하였다.
아힘사(Ahimsa)는 산스크리트어인데, a는 부정 접두사이고 himsa는 해로움을 의미한다. '(생명에게) 어떠한 해로움을 끼치지 않는 행위'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불살생, 비폭력의 의미로 연결된다.
그는 평생 채식을 하였다. 우유나 생선조차도 거부할 정도로 철저한 단식가였다. 아내가 아파서 고기즙을 먹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강하였다. 그는 5km 이상을 걸어다녔고, 하루에도 50통이 넘는 편지를 쓰며 부지런한 일과를 보냈다.
다만, 간디의 이러한 사상의 전통은 간디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간디의 집안은 힌두교의 한 분파인 비슈누교를 믿고 있었는데, 역시 살생을 금한다. 이 종파가 가지는 평화주의, 불살생, 금욕주의는 간디의 사상과 일치한다.
간디의 사상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인도의 전통사상이 빚어왔던 것을 실천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5) 간디의 교육철학
간디는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에 인도인을 위한 학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간디는 교사들의 수입이 높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헌신이 누구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여성교육과 함께, 진실성이 없는 체벌을 반대하고 우열반을 좋지 않게 여겼다.
또한 농사같은 작업(노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사꾼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도 한다. ^^
그리고 간디는 모국어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외래어를 국어로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도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이다. 힌디어, 우르두어, 구자라트어, 타밀어, 벵골어 등 수십가지의 언어가 공존하고 있다.
간디는 이 중 힌두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인도의 엘리트들은 이런 언어들을 다 제끼고 영어를 사용한다. 인도에서 영어는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영어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은 적어도 하고 있는 일의 수준이 낮으며, 인도에서 영어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표시다.
인도가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점도 분명히 있다. 인도는 과학, IT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들을 배출해내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여기에 반대한다. 모국어를 사용해야 엘리트와 서민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고, 주요 기술과 학문들을 모국어로 쉽게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국어를 통해 자기 나라의 문화에 대한 긍지를 높일 수 있다.
오늘날 인도가 영어권 국가로서 비지니스의 이점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인도인들 중에 명망있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그들은 서구인보다 서구중심적인 사고를 띈다고 들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도인들이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없다는 얘기다.
인도가 모국어를 버림으로써 놓치는 점들이 많다. 간디는 이것을 내다보고 모국어 사용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6) 간디의 불편한 진실
간디의 장남 하릴랄은 평생 간디와 의절했다. 그는 자기 가정도 못 돌보는 사람이, 어찌 인도인들을 위해 일하겠냐고 아버지를 비난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삐뚫어졌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내세워 사기까지 친다. 알콜 중독증에 걸린 그는 병원에서 쓸쓸히 죽게 된다.
간디는 가족들에게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영화 '간디'에서는 허드렛일을 하는 부인의 불평을 듣다가 그만 폭발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간디와 가족들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반증이다.
부인 카스트루바이가 사망할때, 간디는 서양 의사의 진료를 거부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 자신은 서양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영국군으로서 간디
간디는 인도 독립투쟁의 상징이지만, 그가 영국과 영국인을 증오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국인들과 많이 교류했었다.
심지어 그는 보어전쟁 때 영국군 의무대로 참전했었고, 양차 대전 시에는 인도인들이 영국을 돕도록 주장하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독립이 아니라 자치에 무게를 두었디.
간디는 불가촉 천민(하리잔)에 선거권을 부여하기로 한 식민당국의 결정에 반발하여 단식 투쟁을 하기도 한다. 간디는 이것을 영국의 술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카르는 힌두교의 악습을 비판하기보다 사람들의 선의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간디를 비판한다.
(7) 제2의 간디 안나 하자레
간디 시대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기차를 타면 사람들의 '무례, 불결, 이기심, 무지'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질서하고 게으르다.
인도는 BRIC'S의 한 국가로 역동하는 국가이지만, 그 내부의 사회문제는 심각하다. 엄청난 갑부들도 많이 생기지만, 하루 1달러도 못 버는 인생들도 수두룩하다.
아직도 카스트제도나 조혼같은 인습이 남아있다. 교통, 수도, 통신 등 사회기반시설은 낙후되어 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심하다. 노동착취를 당하고, 외국인 관광객 꽁무니를 뒤쫓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최근에 안나 하자레라는 빈민 운동가가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 관료들의 부패함과 빈민 철거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제2의 간디'라 불리며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현재에도 간디의 원칙이 유효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 |
인도 '제 2의 간디'로 불리는 반부패 사회운동가 안나 하자레. |
[아시아경제 조윤미 기자] 인도의 반부패 사회운동가 안나 하자레(74)는 제 2의 간디로 통한다.
그는 지난 4월 인도 정보통신부 장관과 고위 관료, 정치인 등이 뇌물을 받은 '통신주파수 스캔들'이 감사 결과 드러나자, 같은달 5일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특히 '로크팔'(힌디어로 옴부즈맨) 법안을 도입할 것을 요구해 일약 반부패 사회운동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정부 허가를 받지 않은채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는 이유로 지나 16일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인구 12억의 인도는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일부 극소수 기득권층만 과실을 챙기고 몰염치한 부자들은 스위스 등으로 자금을 빼돌리는 등 탈세가 만연해 빈부격차가 매우 심한 실정이다. 하자레는 19일 오후 인도전역에서 반포 시위와 단식투쟁을 벌일 예정이다.
뭄바이의 점심 도시락을 운반하는 배달을 하는 5000명의 다발왈라는 120년 역사상 처음으로
안나 하자레의 지원을 표시하기 위해 파업을 벌였습니다.
데리의 오토릭샤왈라 10,000명도 지지하는 파업을 벌였습니다.
인디아의 최고의 학교인 IIM(Indian institute of Management)학생들도 동참하였습니다.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끌었던 자유 운동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라며 젊은 신세대들도 동참합니다.
하지만 간디 시대의 낙후된 인도가 여전히 발전하지 못해서, 간디만큼 혹독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8) 간디의 마지막과 간디가 남긴 의의
1947년 8월 15일에 인도는 독립한다. 하지만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살육과 강제이주가 시작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죽고 죽이는 갈등은 무법천지였고. 캘커타에서는 50만 명이나 희생될 정도였다.
간디는 건국기념식에도 참석을 거부할 정도로, 사회에 뜻을 잃었는데, 살육을 막기 위해 생애 마지막 단식을 한다. 그는 종교 간의 화해를 촉구하며 단식을 계속한다.
그러던 중 1948년 1월 30일, 젊은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만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아인슈타인은 간디를 "이 세상에 태어났던 인간 중에 간디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했고, 함석헌은 간디를 "역사의 조명탄"이라 하면서 극찬한다.
간디의 사상은 루터 킹, 만델라, 바웬사, 아웅산 수지, 달라이 라마 등에게 영향을 끼치며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화적 투쟁의 본보기를 제시하였다.
게다가 간디의 금욕주의, 채식사상은 서양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간디를 통해 삭막해져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간디는 정치가나 경영자는 아니었다. 매우 큰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극복하고 먼저 실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진실에 충실하고 세상과 조화를 꿈꾸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작은 거인' 간디. 그가 우리 청년 세대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간디의 어록>
"나에게 있어 애국심은 인류애와 동일하다. 나는 인간이요, 인간이기 때문에 애국자이다."
" 간디의 7대 사회악 "
1. 원칙없는 정치
2. 노동없는 부
3. 양심없는 쾌락
4. 인격없는 교육
5. 도덕없는 상업
6. 인간성없는 과학
7. 희생없는 종교
<참고문헌>
- 간디; 박홍규 역, <간디 자서전>, 문예출판사, 2007
- 서기남,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 만화 간디 자서전>, 김영사, 2009
- 요르그 치들라우, <경영자 간디>, 21세기북스, 2004
- 간디; 고병남 역, <간디, 나의 교육철학>, 문예출판사, 2006
- 리차드 아텐보로, <마하트마 간디 내 안의 행복을 찾아서>, 세상을 여는 창, 2004
- 영화 간디(1982년 작)
- http://blog.daum.net/wkwoong/183 INDIARA 블로그
'세계의 리더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 민중을 위한 위대한 발자취 - 암베드카르 박사 (0) | 2011.10.09 |
---|---|
현대 인도의 국부 자와할랄 네루 (0) | 2011.09.12 |
탁신 - 아시아에서의 정치 비지니스 (0) | 2011.08.19 |
베트남의 '호 아저씨' 호치민 (0) | 2011.02.24 |
강소국 싱가포르의 설계자 리콴유 (0) | 201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