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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리더십

일본의 개화를 열어젖힌 남자 사카모토 료마

세계의 리더십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가장 고민이 되었던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에서 리더라고 불릴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일본의 총리들은 자주 바뀌고, 총리 본인이 리더십을 발휘하기보다 계파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추대되고 계파의 영향을 받는 시스템이 일본정치다. 강상중 교수의 <반걸음만 앞서가라>에서는, 일본 총리들의 리더십을 '특수한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리더십이라 비유하며, 외국과는 다른 일본만의 현상이라 했다.

보수세력인 자민당이 60년 넘게 집권했고, 현재의 집권당인 민주당도 자민당에서 갈려나온 부류다.

 그럼 일본의 천황은? 1945년 2차 대전 이전에 천황은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신성하게 여겨졌으나, 2차 대전 이후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있다. 물론 천황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대단하고, 일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천황은 책임을 지고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의 리더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세계의 리더십을 기획하면서, 당초의 의도와는 생각이 달라졌다.

정치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을 찾아 배우기로 했다. 어느 한 사람의 리더를 배울 것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심도있게 분석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세 명을 선정했다. 먼저 메이지유신의 시발점이 되는 조슈-사쓰마 두 개혁파 진영의 화합을 이끌어낸 사카모토 료마,

마쓰시타 전기를 창업하여 일본적 경영의 기틀을 다지고, 리더를 육성하고 사회에 공헌하고자 했던 기업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일본 IT산업을 주름잡고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구상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혹자는 일본 총리감이라고 말하는 손정의.

이렇게 세 사람을 다룰 것이다. 첫번째로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다루겠다.

 

Sakamoto Ryoma.jpg 사카모토 료마(1835~1867)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C%B9%B4%EB%AA%A8%ED%86%A0_%EB%A3%8C%EB%A7%88 

▲ 위키피디아의 사카모토 료마 소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1835년에 도사 번에서 하급무사인 향사(鄕士) 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도사번은 지금의 시코쿠 섬 고치현이다.

맹견 중에 도사견이 있는데, 그 도사견이 도사 번에서 유래가 되었다.

고치 현의 위치 고치현 위치

 

대단한 집안은 아니지만 무사 계급에서 태어났기에,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익혔다. 사카모토 료마가 성년이 되던 시기는, 일본 역사에 격동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1853년 7월 8일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다. 대포로 무장한 미국 군함에 일본인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전쟁을 위협하던 페리 제독에 의해, 1854년 3월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이래 취해오던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개국으로 선회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무력한 모습을 보인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지방의 번(藩, 막부로부터 인정받은 영주가 다스리던 지역)과 무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천황이냐 쇼군(막부의 수장)이냐의 권력 싸움은 개국이냐 쇄국이냐의 논쟁까지 더해져, 일본 사회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흑선(서양군함)을 그린 일본화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있었다. 조슈번은 지금의 시모노세키가 있는 야마구치현 지역이었고, 사쓰마번은 지금의 가고시마현 지역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 지역 출신들이 정부와 군의 요직을 장악했다. 조슈 번은 이토 히로부미, 사쓰마 번은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이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가까운 지역 출신들이 한국에 호전적인 자세를 보였다. 

야마구치 현의 위치 ◁ 야마구치현                                    가고시마 현의 위치 ◁ 가고시마현

 

두 지역 모두 막부의 중심지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의 영주들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지 않고 도요토미가에 충성을 바쳤던 이들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에 가까운 지역은 충성도가 높은 가신들에게 영지로 주었고, 반기를 들었던 이들은 변두리에 영지를 주었다.

250년이 지나, 도쿠가와 막부가 흔들리자 조슈번과 사쓰마번에서는 정치적인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난다. 이 두번은 바쿠후의 반대편에 서서 천황을 옹립하고, 막부가 맺은 개방정책을 철폐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두 번은 서로 경쟁하였으며, 사쓰마번이 천황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가 합치자는 고부갓타이(公無合體)를 주장하자, 조슈번이 이를 반대하면서 서로 갈등을 겪었다.

게다가 두 번은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외국 상인을 죽인다든지 외국 상선에 발포를 하는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이러한 두 번에 대해서 서양 열강들은 대포로서 응징을 가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이 말 안 듣는 이라크나 리비아에 공습을 가한 격이다.

이 공격으로 두 번은 정신을 차려 존황양이(천황을 모시고 외국을 배척한다)에서 존황개국으로 선회한다.

 

1864년애 막부가 조슈 번을 손봐주면서 조슈번의 존황개국파들이 몸을 피했다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그는 야마구치 현 출신이다. 막부가 또다시 조슈번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는 사이, 조슈번도 대책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이다. 그는 갓 서른을 넘겼다.

본래 사카모토 료마는 충실한 존황양이파였다. 그는 개국을 주장하던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려 했는데, 오히려 서양문명을 도입해서 나라를 발전시키는 그의 주장에 설득당하고 만다.

이후 탈번, 자신이 소속된 도사 번을 이탈하여 나가사키, 고베 등의 항구도시를 떠돈다. 각지의 개화파들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해운업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1864년에 고베 해군 훈련소를 설립하였고, 1867년에는 가메야마 조합이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한다.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해외 무역과 홋카이도 개척을 추진하고자 한다.

가이엔타이(海援隊)라고 개칭하는 이 회사는 사설 해군의 역할도 맡았었다. 사카모토 료마가 살았을 당시에는, 배가 침몰하여 그 처리를 수습하기 바빴다. 아직 일본의 해운기술은 낙후되었기 때문이다.

 

 가이엔타이의 나비깃발

 

http://ko.wikipedia.org/wiki/%EA%B0%80%EC%9D%B4%EC%97%94%ED%83%80%EC%9D%B4 ◁ 가이엔타이 소개

 

다시, 1866년의 상황으로 돌아오면,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가 중재하여, 조슈번과 사쓰마번 사이의 '삿초 동맹'이 이루어진다. 조슈와 사쓰마는 존황양이파였다가 서양의 위력을 알고 개국으로 선회했고, 토막(討幕, 막부를 치는 것)이라는 목표로 뭉치게 된다.

1867년 7월에는 교토로 올라가,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상주한다.

'선중팔책'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천하의 정권을 교토 조정에 반환하고, 새 법령을 조정에서 세운다.

제2장 상하의정국을 설치하여 의원을 뽑아 만사를 의결에 붙여 결정한다.

제3장 유능한 제후를 등용하여 관작을 내리고 기존의 유명무실한 관직을 없앤다.

제4항 외국과 교역을 확대하고 새롭게 올바른 규약을 정한다.

제5항 기존의 율령을 폐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다.

제6항 해군을 확대한다.

제7항 친병을 두어 교토를 수비하게 한다.

제8항 금은 시세를 외국과 같게 한다.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헌법을 만들고, 군사력을 확대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외국에 당당해질 것을 주장한다. 이는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현실화되었다.

또한 제1항에서 쇼군이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주장한다. 도사 번은 중재와 협상에 나섰고, 사카모토 료마는 영주의 책사로서 활약한다.

결국 1867년 11월 9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천황파와 막부파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고, 이 와중에 사카모토 료마는 암살당한다.

그 다음해인 1868년 쇼군은 천황 메이지에게 완전히 정권을 넘기고, 막부파의 재산과 안전은 보장받는다.

그 이후 일본은 메이지 천황과 개국파들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개혁시켰다.  

 

파일:Taisehokan.jpg 대정봉환 장면

 

대정봉환이 있은 직후인, 1867년 11월 15일 사카모토 료마는 동지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오미야라는 여관에 머물다, 자객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고 만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를 암살한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막부에서 보냈을 것이거나, '신센구미'라는 존황양이파 무사집단이거나, 사쓰마번이거나 하는 추측은 있었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짧은 생을 살았고 이후 일본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의 부인은 집도 없을 정도였다.

 

 오미야 여관이 있던 자리

 

그는 짧은 삶을 살다갔지만, 개화파 진영의 화합과 대정봉환이라는 계책을 올려 메이지 유신의 단초를 마련했다. 그런 그를 후대의 일본인들은 그리워하고 추앙한다.

2000년 3월 아사히 신문이 "지난 천 년 간 일본의 최고 정치 지도자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위는 바로 사카모토 료마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위, 오다 노부나가 - 다나카 가쿠에이 - 요시다 시게루 - 도요토미 히데요시 순이었다. 벼슬도 없던 시골무사 사카모토 료마가 전국시대 삼걸과 전후 수상들을 제치고, 일본 역사상 최고의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끈 영웅… 경제위기 극복 반면교사 재조명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 열풍에 휩싸인 일본

2010년 11월 09일 11시 43분
일본 막부 말기인 1861년 한 시골 출신 하급 무사가 에도(오늘날의 도쿄)로 상경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에 울분을 토하며 검술을 연마한 그는 개화파의 거두를 암살하려 시도하지만 오히려 그 사상에 감화 받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훗날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된 그의 이름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였다.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계기는 1962년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서다. 그는 막부시대 말기 당대의 손꼽히는 검객이자 서양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선구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근대화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불린다.

그는 당시 최대 지방 세력인 사쓰마 번(薩摩藩)과 조슈 번(長州藩)을 중재해 에도 막부 타도를 위한 동맹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막부가 메이지(明治) 천황에게 통치권을 넘긴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이루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봉건시대를 종식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료마가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풍운아로 불리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도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된 이유 중 하나다. 요즘 일본에는 사카모토 료마 열풍이 불고 있다.

료마를 주제로 한 TV 드라마만 8개가 제작됐고 료마 ‘마니아’들까지 생겨날 정도다.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들도 연설에서 료마를 단골로 언급한다. 자신의 롤 모델이 료마라고 말하는 손정의(마사요시 손) 소프트뱅크 회장이 대표적이다.

NHK가 올해 1월부터 드라마 ‘료마전’을 방송하기 시작한 이래 상반기 료마의 출생지인 시코쿠(四國) 남부 고치현(高知縣)의 관광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1% 늘어난 240만 명을 기록했다. 료마 ‘붐’으로 창출된 고치현의 경제 효과만 409억 엔에 이를 정도다.

일본 삿포로맥주는 9월부터 일본 전국에 ‘어이! 료마’란 이름의 한정판 맥주를 출시했다. 오가와 가쓰히토 삿포로맥주 홍보담당은 “지금까지 48만개가 팔렸으며 올해 가을까지 120만개가 팔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료마의 인기가 높은 데는 오늘날 일본이 처한 상황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소비자 물가가 급락하고 재정 적자가 불어나는 가운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 일본 경제의 전망은 어둡다. 엔고로 수출기업이 고전하고 있지만 환율 문제의 국제적 해결 논의에서도 일본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영유권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간 내각의 지지도까지 하락하고 있다. 고치현 료마기념박물관의 모리 켄시로 디렉터는 “료마는 일본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서양 열강에 맞설 수 없다고 보았다”면서 “오늘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의 상황은 료마의 시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역사를 개척한 료마의 모습이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식 아시아경제 기자 grad@asiae.co.kr

 

 NHK 드라마 료마전

 

사카모토 료마는 짧은 삶을 살다갔으나, 그의 개척정신과 의지는 후대 일본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를 다룬 소설, 영화, 드라마가 끓임없이 나오고 있다. 특히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는 료마 열풍을 일으켰다. 료마의 우국충정과 새로운 국가 형성을 위한 고뇌는 일본인들에게 자국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켰으며, 이른바 시바사관(司馬史觀)이라 한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이 소설을 통해 사카모토 료마에게서 항상 배운다고 말한다.

그의 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사기(社旗)도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 깃발에서 따왔다고 한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191045&cloc=olink|article|default <- 손정의 회장 인터뷰

 

ファイル:SoftBank logo.svg 소프트뱅크 회사 로고

 

료마. 그는 벼슬을 한 적이 없는 시골의 일개 무사였으나,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또한 대립하던 두 진영을 하나의 목표로 뭉치게 하고,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다.

그를 통해 평범하고 배경이 없는 사람도 꿈과 비전이 있다면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그런 사카모토 료마를 일본인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8 - 일본 역사편>

마쓰우라 레이. <사카모토 평전>

노대현, <CEO가 알아야할 일본인 12명>

야마오카 소하치. <사카모토 료마>